'저인지'라는 개념은 1950년대 타히티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연구를 수행한 인류학자 밥 레비(Bob Levy)는 심리치료사로서 뒤늦게 인류학 연구에 뛰어든 사람입니다. 그는 왜 타히티에는 그렇게 자살률이 높은지 의문을 풀고자 연구를 시작했고, 타히티어에 '슬픔'이라는 개념을 지닌 단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슬픔을 느끼고 경험하지만, 그것을 이름 붙일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정상적인 감정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을 치유하는 의식도, 슬픔을 위로하는 관습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실히 필요한 개념을 결여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높은 자살률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61페이지 中에서.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얽힌 '슬픈' 이야기다. 아, 조금 수정해서 이야기하면 '슬픔'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얽힌 이야기다. 타히티 사회에 진정 '슬픔'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조지 레이코프는 '저(低)인지(hpocognition)'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 '저인지'란 필요한 생각 - 즉, 한두 단어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하고 고정된 프레임이 결여된 상태를 뜻한다.
조지 레이코프는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국 공화당이 주로 사용하는 수사인 '세금 구제(tax relief)'를 언급한다. '세금 구제'라는 말이 가지는 뉘앙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세금은 나쁜 것', '세금을 줄이는 것은 나를 구제해주는 좋은 행위'라는 프레임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민주당은 그 용어를 비판하는 데 그치면서 '저인지'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세금 구제'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공화당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고,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개념을 설명할 '단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세금은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라는 식으로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프레임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잠시 촛불 집회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달여간 진행되고 있는 촛불 집회는 현재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촛불 수의 감소가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추가 협상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연일 계속되는 집회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촛불집회의 방향성'에서 사람들은 가장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쇠고기 재협상까지만 주장할지, 민영화 문제를 포함한 5대 의제까지 주장할지, 아니면 정권퇴진까지 주장할지에 이르는 촛불집회의 '목적'에 대한 고민이다. 또한 정치성을 가진 단체와 자신들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시민 간의 '결합'에 대한 고민이다.
이렇게 여러 논의가 난항을 겪으면서 촛불 집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반면, 정부 측은 일관성을 가지고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촛불 집회로 인해 잠시 휘청거렸지만 촛불 집회가 숨을 고르는 틈을 타 프레임 장악에 나서고 있다. ( "프레임 쟁탈전, 새로운 라운드" 참조) 특히 최근에는 (우석훈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제의 용사'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문열, 조갑제로 대표되는 '어제의 용사'들의 폭탄 발언들이 계속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명백히 촛불 집회 측의 위기다. 종전과 같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진실'과 민주주의에 대한 '진심'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응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한 달여 간 타올랐던 민주주의에 대한 싸움은 이제 지루하고 긴 공방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문제 해결의 키를 잡고 있는 정부는 귀를 닫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5대 의제, 대미 관계, 정권 퇴진 운동 등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앞으로의 싸움은 이전보다 정치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많다. 복잡해지는 상황 속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기술'이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 측이 가지고 있는 '저인지'의 문제는 심각하다. 촛불 집회의 방향성에 대한 의견 수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은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프레임에 매여 '우리의 방향'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우리가 그동안 반대해왔던 '상대방'을 잊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방향보다도 다시 한번 '상대방'에 비판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상대방'을 제대로 규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비판의 칼날도 무뎌진다. 요즘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논의의 대부분은 그 칼날의 방향이 촛불 집회 측으로 돌아와 있다. 이 방향을 다시 정부로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명박 정부'를 규정지을만한 어떤 단어 - 즉, 우리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촛불 집회 정국에서의 '저인지' 상태이다.
촛불 집회에 나가서 우리는 단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가치 중립적이어도 너무 가치중립적이다. 이 정부를 'ㅁㅁ정부'라고 규정하여서 비판의 각을 확실히 세울 필요가 있다. 가끔씩 '독재 정부'에 반대한다는 구호가 나오긴 한다. 하지만 독재 정부는 현재의 정부를 규정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과거 독재 정부와 유사한 자세를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은 없다. 국민들이 제 손으로 만든 정부다. '보수 정부', '권위주의적 정부'라고 규정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개념짓기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사고의 프레임을 제공하는 데에는 그 단어의 식상함과 고루함으로 인해 한계가 있다. ('쥐xx'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를 표현할만한 몇 가지 단어를 한 번 제안해본다.
1) 사오정 정부, 치매 정부
: 사오정 정부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 귀를 닫고 있는 태도에 기초한 단어다. 치매 정부는 자신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안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는 말바꾸기를 한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조금 부적절해보인다. 사오정 정부는 단어의 파괴력이 작고 조금 장난스러워 보인다. 치매 정부는 뜻하는 바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고 치매 환자분들을 고려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2) 반민(反民) 정부
: 반민 정부는 국민의 의견에 계속해서 NO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붙여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의 효과는 독재 정부와 보수 정권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독재 정부'와 가까운 효과를 가지면서 현재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3) 고아 정부
: '국민이 뽑았지만 국민에게 버림을 받은 정부'라는 뜻이다. 실제로 현재의 정국을 보면 정부는 고아다. 부모는 정부를 버렸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아이가 부모에게 돌아오는 법 뿐이다. 하지만 이 단어 역시 '고아'를 너무 무시하는 듯한 어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중에서 2) 안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역시나 내 머리로는 적절한 단어를 단시간에 떠올리기가 어렵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바로 우리의 집단 지성이다. 학계와 언론계가 놀라고 찬사를 마지 않은 우리의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이명박 정부'를 규정할 단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단어를 언론에서도 자꾸 조명해야 하고 시민들은 촛불 집회에서 계속해서 외쳐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이명박 정부에 확실한 낙인을 찍어두어야 한다.
우리만의 무기를 가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을 덮어쓰게 된 한나라당은 천막 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명박은 '경제'만 외치고는 덥썩 대권을 잡았다. 최근 보수 인사들이 촛불 집회를 '촛불 장난'이나 '천민민주주의'로 비유하는 것도 '개념짓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타히티의 비극이 우리 사회에 재현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 머리를 싸매고 이명박 정부에 별명을 붙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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